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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의 변천사 본문
명리학 이론은 음양오행의 生剋 制化를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음양오행 이론의 유래와 전개의 과정을 검토하는 것은 명리학의 생성과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당송대에는 성명학이 대단히 흥성하였는데, 이는 자평 명리학의 계보가 성립하기 이전 명리학을 말한다. 이러한 명리학이 형성된 시기를 다시 세 가지 단계로 나누면 잉태의 시기, 고법의 시기 및 금법의 시기이다. 잉태의 시기는 ‘대응의 규칙’의 탐색을 기점으로 하고 고법의 시기는 이허중의 고전적 모형이 나타난 사건을 기점으로 한다. 금법의 시기는 서자평의 모형이 나타난 사건을 기점으로 한다. 이러한 구분은 연구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된 것이고 더욱 높은 단계로 탐색하는 방향과 내용을 지닌다. 전통적 명리학이 발전하는 두 번째 시기, 즉 심화의 시기에는 서방파와 강호파라는 주요한 두 노선이 있다. 서방파는 표준적 모형을 진일보한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반면에, 강호파는 ‘대응의 규칙(통계적 분석)’의 탐색을 이어갔다. 그러나 고전적 모형은 기본적으로 이 심화의 시기에 없어졌다.
신해혁명 이후에 전통적 명리학의 발전은 새로운 역사의 단계로 들어섰다. 이는 전통적 명리학이 발전하는 세 번째 시기, 즉 현대적 연구의 시기이며 전통적 명리학이 필사적으로 도전했던 전환의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오대의 말기를 지나 북송시대의 초기로 들어서면서 전통적 명리학이 발전하는 과정은 마침내 중대한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명리학이 싹트기 시작한 동 한시대의 말기에서 이미 700년 내지 800년이 흐른 뒤였다. 이때에 서자평의 새로운 모형이 출현하면서 전통적 명리학이 형성되는 단계인 금법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모형, 즉 명을 추론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송, 원, 명, 청의 각 왕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를 ‘표준적 모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틀에서 보건대, 표준적 모형과 고전적 모형의 차이점은 제일 먼저 명을 논하는 출발점이 바뀌었다는 것에 있다. 즉 표준적 모형은 년의 주(년의 천간)에서 일의 주(일의 천간)로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일의 천간은 “일의 주축 혹은 명의 주축”이라고 불리면서 팔자의 구조의 핵심이 되었다. 전통적 명리학, 즉 송대 초기의 서자평으로부터 명대 중기의 『삼명통회』까지 금법의 시기라는 600년의 발전적 성과를 정리하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업적은 팔자를 분석하는 데에 표준적 모형의 분석적 틀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이론의 커다란 배경이 음양오행 학설과 자연생태의 유형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연생태의 유형에서 사계절과 오행의 활용은 중요한 내용이다. 그것은 자연의 기가 사계절의 순서대로 운행하는 상황을 개괄한 것인데, 팔자 내부의 구조적 요소를 분석하는데 기본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명리학이 형성되는 시기를 보면, 여기에는 일관된 두 가지 중요한 맥락이 있다. 하나는 경험상의 대응의 규칙을 탐구하고 총정리하는 것인데 이는 명리학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기초가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이론의 모형을 구성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바로 이론의 모형이 형성되고 발전하기 때문에 팔자의 명리학이 마침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인식의 수준에서 역사상 어떠한 추명술보다 뛰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팔자의 명리학을 일종의 지혜 또는 일종의 학술이라고 여기는 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 시기에 최고의 성과는 표준적 모형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그것도 어느 정도 완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표준적 모형은 팔자에서 명을 논하는 기본적 모형이다. 그 속에 명리를 분석하는(암호의 해독) 부분은 모형의 핵심적 부분이다. 전통적 명리학은 음양오행설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자연생태에 함유된 간지의 부호 체계를 융합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서 대단히 오랫동안 비유적상의 길을 따라 탐색해 나갔다.
고법의 시기에 고전적 모형은 주로 간지납음의 비유적 상을 추리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60 갑자에 구성된 30종의 기본적 납음의 비유적 상을 추리하는 데에 숙련되게 연역해야 했으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잡한 사회생활의 현실까지는 결코 반영되지 못하고 끝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대와 송대 초기에 서자평은 단호하게 납음을 버리고 전적으로 오행을 위주로 연역하였다. 이는 분명히 가장 중요한 전환이었다.
참고문헌 : 양희랑, 2021, 명리학사에서 본 子平의 명리학과 中和의 방법론적 지평, 공주대학교일반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