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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과 인간의 삶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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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과 인간의 삶

베지멀 2021. 3. 3. 20:04

인간의 삶은 세 개의 접점에서 결정된다. 첫 번째는 '하고 싶은 것'이다. 멋있게 말하면,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유아기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결정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한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이야말로 식욕과 성욕에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의 조건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은 '하고 싶은 것'이라는 이 다섯 음절의 말에 결정된다. 이것을 명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음양오행의 조합이 그걸 가진 이가 애초에 우주의 어떤 요소들을 욕망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십신으로 진화하는 모든 과정은 한 사람의 인간이 한 시대와 한 공간의 좌표 위에 놓여 무엇을 열망하는가에 대한 요약이다. 두 번째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화는 곧 인간이 인지능력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지능력이란 시간과 공간을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의 많은 갈등과 모순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근원적인 어긋남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명리학은 의미가 있다. 만일 명리학이 하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리학은 현세의 학문이다. 미래의 학문이 아닌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다. 십신, 십이운성, 신살, 합과 충 등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현실적으로 구현 가능한 것의 내용, 그것에 필요한 에너지 등, 명리학은 바로 그렇게 한 인간의 원국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그것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을 과학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하고 싶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언젠가 어떻게든 모두 죽는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하루하루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자기의 시간과 공간에서 실현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지혜롭게 조화시키며 창조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명리학이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은 누구에게는 쉽고, 누구에게는 어렵다. 그러면 쉬운 것은 좋고, 어려운 것은 나쁜 것인가? 명리학에 숨은 반전은 여기에도 숨어 있다. 생각해보면 단순하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으며, 어렵게 얻은 것은 어렵게 잃는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되었든 어렵게 얻는 과정 자체가 내게 재앙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재앙은 무엇일까? 어려울 것 같아서 미리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게 곧 재앙이다. 쉽게 얻는 것 역시 재앙이다. 인생에서 재물이든 기회든 뭔가를 쉽게 얻은 이들이 너무나 어이없게 얻은 것을 한순간에 잃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출처:픽사베이>

명리학은 '인간관계에 관한 학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만남의 유형이 있다.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 친구나 동료, 선배 혹은 상사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흔히들 사람을 '잘 만났다, 못 만났다' 하는 말을 하는데 좋은 만남이나 나쁜 만남은 애초에 없다. 단지 조심스러운 만남이 있을 뿐이다. 명리학을 공부할수록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관심을 더 갖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꺼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난 것이 내게 꼭 좋기만 할까? 나와 잘 안 맞는 사람을 만난것이 과연 내게 해롭기만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내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나와 마음 잘 맞고 잘 지내던 사람이 의도와 관계없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의지에 좌우된다. 명리학을 통해 우리가 들여다보는 원국과 대운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런 의지를 더욱더 전략적이고 현실적으로, 효율적이고 지혜롭게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프레임일 뿐,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의 틀이 아니다. 우리가 명리학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을 전제로 한다면 명리학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명리학이 한 개인의 기복적 소망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면, 개인의 인격적 도야의 처세술에서 멈추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한 인간의 풍요로움은 또 다른 인간의 풍요로움을 불러오고 이 풍요로움의 운동은 하나의 공동체에서 더 큰 단위의 시민사회로 확대되며, 그것은 국가를 넘어 인류 전체의 지평으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커뮤니티들은 왕성한 탐구심과 창조적 노동을 통해 생산력을 일구어내고 가치를 공동으로 창출해내야 한다. 진정한 재성이란 정재의 자기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재의 봉사심이 동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 재성의 다양한 재능과 물질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그 위에 법과 제도가 여유있게 운영되어야 한다. 더러운 재물을 바탕으로 권력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권력이 될 것이다. 진정한 권력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치 [정관]와 미래지향적이며 이상적인 목표[편관]가 균형 있게 어우러져야 한다.

수많은 사회적 지혜가 다시 나와 우리를 생존 할 때, 그리고 이 순환이 끝없이 이어질 때 우리는 죽어도 죽은 존재가 아니며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존엄함을 저 영겁의 우주 속에서 구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오행의 순환은 한 사람의 개인 안에서나 그 개인이 몸담고 있는 커뮤니티나 국가 같은 단위나 지구 혹은 더 나아가서 우주와 같은 거대한 단계에서도 사실상 똑같이 통용되고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고 아는 것, 그것이 명리학의 전부이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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