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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회, 문학적 사상과 명리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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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회, 문학적 사상과 명리학

베지멀 2021. 3. 2. 19:42

조선은 1392년 즉위한 태조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8년간 지속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퇴하였으며, 밖으로는 리민족의 침입이 계속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성계는 여진족ㆍ홍건적ㆍ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높이며 중앙 정계에 진출, 조준ㆍ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구세력인 최영 일파를 숙청하고, 또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에서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니, 이를 이성혁명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초기부터 유교주의 국가이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기관을 증설하고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확대시켰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원이 각지에 설립되면서 선현에게 제사하기도 하고 지방의 양반자제들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한편 조선의 국어ㆍ국문학은 훈민정음의 창제를 계기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녔으나 조선 초까지 우리의 고유한 문자를 갖지 못하고 한자를 써오다가 훈민정음의 창제로 비로소 독립적인 문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우리 고유의 언어에 알맞으며, 자유로이 생각하는 바를 적을 수 있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창제하기 위하여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1443년 28자의 표음문자로 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치국의 지도이념으로 내세움으로써 어느 왕조보다도 뚜렷한 유교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으나, 유교가 종교의 기능을 담당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불교ㆍ도교ㆍ민간신앙을 국가신앙으로 다시 흡수하기도 하였으나, 16세기 이래 사림에 의한 성리학이 융성하면서 교조주의화하자, 다른 일체의 사상과 종교를 이단과 사교로 규정, 유교에서의 조상숭배 사상을 종교적 단계로 끌어올려 제사를 매우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종교활동은 민간에서 전승되었다. 배불주의를 내세운 조선은 고려에서 폐단이 심하였던 불교를 교ㆍ선 양종으로 통합하고, 사찰의 수효를 대폭 줄이는 동시에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불교의 사원 경제를 약화시키고, 택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였다. 그러나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종교행사는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불교 경전을 새로이 간행하고 언해에 힘썼다. 도교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 난립된 도관을 정비하여 소격서로 하여금 제천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마니산의 초제가 가장 유명하다. 소격서에서는 도학을 잡학의 하나로 가르치고, 도유라는 관리를 두어 도교 행사를 집행하게 하였는데, 세조는 특히 도교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 사림에 의해 도교 배척운동이 일어나 소격서가 폐지되고 조정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도인들은 환인ㆍ단군을 한국 도교의 시조로, 김시습을 중조로 각각 내세우면서 점차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여 일반 서민들에게 큰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도교와 관련된 예언 사상은 각종의 비기ㆍ참서에 반영되어 정감록, 토정비결 등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출처:픽사베이>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민간신앙으로부터 민족종교의 바탕이 된 무격신앙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유교의 합리정신 때문에 크게 위축되었으나, 그 민족자각적인 측면과 의술적인 측면은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예컨대, 환인ㆍ환웅ㆍ단군은 옛날부터 조물주이자 인간 길흉화복의 주재자로서 민간에 널리 신앙되어 왔고, 황해도 구월산에는 이른바 삼신을 제사하는 삼성사가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 말 조선 초에 단군이 국조로 인식되면서 조선 초기에는 삼성사에 대한 제사를 국가에서 주관하였다. 무당에 의한 질병치료는 민간에 많은 폐단을 일으켜, 조선 초기에는 미신이 억제되면서 보다 과학적인 치료법이 개발되었으나, 무당 치료가 지닌 긍정적 요소를 흡수하여 이를 국가의 각종 제사와 질병치료에 부분적으로 원용하였으며, 이들을 국무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림의 집권으로 미신으로 배척되어 민간신앙으로서만 전승되었다. 진료수단이 거의 없고 문맹이 극심한 서민 사회에서는 무당이 곧 길흉화복의 주재자로서 맹신되었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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