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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사주명리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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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사주명리학

베지멀 2021. 3. 2. 07:32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이라 함은 삼국의 건국 연대[신라:BC57, 고구려:BC37, 백제:BC18]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예맥족과 한족 사회에는 철기문화가 보급됨으로써 어업, 목축과 함께 농경이 크게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강되었고, 기병 전의 등장으로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안으로는 인접한 정치세력 간의 통합이 촉진되고, 밖으로는 요동군ㆍ현도군ㆍ낙랑군ㆍ대방군 등 중국의 식민지 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 왕권이 성립되고 그 지배력도 강화되어 갔다. 고구려는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5부에 대한 국왕의 지배권을 상당 부분 확립하고 책구루를 설치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백제는 고구려보다 약 100년 늦은 고이왕(234-285년)때 고대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백제의 성장에 위협을 받게 된 낙랑군은 백제를 자주 침입하였고 책계왕을 죽이는 등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 세력과의 힘든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신라는 왕호로 볼 때 거서간, 차차웅 시기에 이어 연장자인 연맹장을 뜻하는 니사금 시기를 지나 대수장을 의미하는 마립간 시기에 이르러 고대왕국을 이루었다. 신라 고대 왕권의 성립은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356-401년)때의 일로, 고구려보다 약 200년, 백제보다 약 100년이 늦다. 신라는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계속되어 이들이 신라에 미치는 압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고대국가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삼국시대에는 수렵이나 어로, 열매채취 등의 방식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으며 일부 종족 사이에는 목축도 비중이 있었지만, 거의 절대적인 농업 사회였다. 따라서 농토의 소유와 경영은 사회경제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삼국시대 초에는 인구에 비해 대지가 상대적으로 많아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도 가능한 정도였다. 토지에 대한 공동체적 성격이 존속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를 점유하고 경작한 자의 해당 토지에 대한 권리가 관습적으로 인정되었다.

삼국시대 주민들은 노래와 춤을 매우 즐겼다. 고구려의 경우 저녁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공부에도 힘써, 수도에 태학이 설치되었고 지방에도 경당이라는 수련기관이 있어 농촌의 평민 자제들까지도 책 읽기와 활쏘기를 하였다. 백제의 경우에도 국가적으로 중국의 왕조로부터 유교의 경전을 수입하여 가르치고 왜에 학자를 파견하여 이를 전하고 가르쳐 주었다. 신라의 경우 학자들이 스스로 제자를 가르치며 유학의 경전들을 읽히기도 하였다.

<출처:픽사베이>

삼국시 대인들의 신앙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조상신을 숭배함은 물론 천신이나 산천신 들을 섬겼다. 삼국시대 중반 이후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일반민 사이에서도 불교가 확산되었으며 중국에서 도교가 들어와 신앙화 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문화와 접촉하기 쉬운 만주지역에서 성장하여 가장 먼저 고대국가를 성립시켰고, 오랫동안 한나라의 침략 세력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자주적으로 외국 문화를 수입하였다. 고구려는 중국문화뿐 아니라 인도 문화ㆍ서역 문화 및 북방문화와 먼저 접촉하면서 이를 정리, 소화하여 고대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백제ㆍ신라에 전하는 구실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도나 서역, 중국이나 북방 민족과 우리나라 삼국에 공통되는 국제문화의 기준을 제공하며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다. 이로써 삼국으로 하여금 국제문화 정세를 자각하고 한족 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문화적 탄력성을 갖게 하여 한문화에 전적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한국불교가 가지는 호국사상도 이러한 역사적 전통 밑에서 성립된 것이다. 원광이 제시한 세속오계도 신라의 전통적 사회 체질을 토대로 유교와 불교를 아울러 이해하면서 세운 신라 고대사회의 가치 기준이었다. 이와 같이 삼국 사회는 불교를 통하여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편, 삼국은 공히 중국으로부터 한학을 수입하여 배우는 데 노력하였다. 한학은 유학을 중심으로 한 중국 고중세의 종합적 학문으로, 삼국은 이의 습득을 통해 통치 철학을 보강하고 행정의 체계화를 시도하며 보다 세련된 문화생활을 도모하였다. 진흥왕 순수비에서는 서경과 논어의 구절을 이용하면서 고대국가의 왕자의 권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고대국가적 경험의 단계가 시경이나 서경에 나타난 주나라의 정치ㆍ사회경험과 유사하여, 삼국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기 612년[진평왕 34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임신서기석에는 시경ㆍ서경ㆍ예기ㆍ춘추 등을 읽은 것이 나타난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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