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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명리학의 탄생 본문
命(명)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 主宰的天(주재적천) 개념에서 명이 개인의 운명에 대한 것임에 자각을 함으로써 개인에 대하여 예측해 보기 위한 노력들에 의하여 術數學(술수학)이 발전을 하게 된다. 唐(당)나라는 618년 李淵(리연)이 건국하여 907년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명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으로는 漢(한)나라에 이어 제2의 最盛期(최성기)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 및 제도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 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종교와 문화, 교육은 도교를 중시하고, 불교를 숭상하는 사회적 풍토를 이루게 되며, 천문ㆍ점성학과 역법의 발달로 인도, 티베트의 밀교에서 다루는 '星學(성학)'에서 술수학이 유입되어 간지론과 음양오행론이 명리학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중국은 일찍이 상고시대부터 天象(천상)의 질서체계를 정리하는 역법의 발전이 있었으며 상고시대의 四分曆(사분력), 전한의 태초력, 삼통력, 삼국시대 魏(위)의 경초력, 吳(오)의 건상력(乾象曆), 동진 384년 경 강급의 삼기갑자원력, 南朝(남조) 宋代(송대)의 영초력(永初曆)과 원가력(元嘉曆), 北朝(조) 北魏(위)의 현시력(玄始曆)과 신구력(神龜曆), 정광력(正光曆), 북제의 천보력(天保曆), 북주의 大象曆(대상력)이 그 사례이다. 이처럼 한대 이후 남북조 시대까지의 중국 역법의 발전은 隋王(수왕) 朝(조)에 의한 천하통일에 호응하여 隋(수)나라의 유작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역법에 관한 지속적인 발전과 더불어 당대에 와서 외래문화의 도입은 명리학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는 인도 또는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불교도 사이의 천문 역법가로부터 새로운 천문역법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에는 迦葉(가섭), 拘摩羅什(구마나심), 瞿曇(구담)의 印度曆法(인탁력법)이 전해졌으니, 당 고종 때 이순풍(李淳風)의 인덕역개찬을 비롯하여, 현종 때 승일행에 의해 만들어진 대연역(大衍曆)이 8회에 걸쳐 개정되었을 정도로 역법이 성행하였다. 이는 역법을 통한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는 점성학도 함께 발전했으리라 보인다. 이러한 것은 명리학이 정립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명과 운을 읽어 내는 명리학의 정확한 유래는 전거불족으로 미상이나 전국시대 珞琭子(낙록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다. 그러나 釋曇瑩(석담형)이 지은 낙록자부수(珞琭子賦註)를 보면 "胎中(태중)에 만일 녹(祿)이 있으면 貴豪(귀호)의 家門(가문)에서 出生(출생)하고, 만약 空亡(공망)에 놓여 있으면 貧窮(빈궁)으로 怨望(원망)과 恨歎(한탄)을 자아낸다."는 鬼谷子(귀곡자)의 말을 인용한 것과 또한 청대의 廖冀亨(료기형)이 1,728년에 집필한 ‘子平八字四言集腋(자평팔자사언집액)’에는 "星命學(성명학)의 起源(기원)은 周(주)나라의 珞琭(낙록)과 鬼谷子(귀곡자)이다."라고 하는 두 문헌상의 구절로 보아 귀곡자 또한 명리학의 태동에 상당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한대 이후 당대 초기 명리학 탄생 이전까지의 약 350년간은 삼국시대와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시대로 정치적으로는 실로 전국시대에 비견할 만한 혼란과 불안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기가 정리될 무렵인 북주말에서 隋(수)나라 초기에 蕭吉(소길)이 음양론과 오행론에 관한 기존의 제반학설을 집대성한 ‘오행대의(五行大義)’를 편찬하였고, 이어 袁天綱(원천강)이 비로소 사람의 生(생) 연월일시를 간지로 대체한 사주를 통하여 사람의 운명을 논하는 이론체계를 그의 저서인 ‘袁天綱五星三命指南(원천강오성삼명지남)’에서 정립함으로써 사주 명리학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서자평 기원설과 이허중 기원설에 대한 명리학 이론체계가 성립된 시기의 논란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서 천문력상과 역학에 밝았던 일행(一行)은 ‘대연력(大衍曆)이라는 역서와 성역서 ’一行禪師天元賦(일행선사천원부)‘라는 명리서를 만들었고, 일행의 학문은 이필에게 전해지고, 이필의 학문은 다시 이허중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일행이나 이필의 학문은 사주명리학이라 하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 이후 사주명리학에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은 이허중에 의해서인데, ’李虛中命書(이허중명서)‘를 지어 명리학의 중흥을 이루었다. 이허중은 '日(일)'과 '年(년)'을 동시에 적용하여 사주를 봤는데 이것이 '年本日主論(년본일주론)'이다. 년을 本(본)으로 하고 日(일)을 위주로 보는 명리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발명이다. 이처럼 이허중은 오행 분야에 대단히 능통하였고 역법의 원로조차 그와 득실을 비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명학에 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려 했음을 알 수가 있다. ’李虛中命書(이허중명서)‘는 상ㆍ중ㆍ하 세 권으로 이루어진 명서이다. 귀곡자가 ’鬼谷子遺文(귀곡자유문)‘이라는 글을 썼고 唐代(당대)의 이허증이 이 귀곡자유문에 주석을 달아 이허중명서라는 책명으로 엮어낸 것이다.
참고문헌 : 한규진, 2017, 韓國傳統의 四柱 分析에 대한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